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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담 】 얻으면 잃고, 잃으면 얻는다?

insighteden 2026. 5. 1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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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에너지는 창조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전환될 뿐이다."
- 열역학 제1법칙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리학 교과서의 한 줄이, 철학자의 오랜 명제가, 종교의 오래된 가르침이, 그리고 아침마다 달리는 러닝 코스가 - 결국 전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요.


동양도, 서양도, 양자역학도 결국 같은 말을 한다

음양론에는 이런 개념이 있습니다.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되고,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된다. 노자는 곡즉전(曲則全) - "굽히면 오히려 온전해진다"고 했습니다. 불교는 욕망(집)이 고통(고)의 원인임을 명시하고, 그 욕망을 내려놓는 것(멸)을 해방의 조건으로 봤습니다.

서양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네메시스(Nemesis)는 지나친 행복이나 오만에 반드시 응보를 내리는 여신입니다. 기독교의 자유의지 개념도 선택의 능력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물리학.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수록 운동량을 잃고, 운동량을 정확히 알수록 위치를 잃는다고 말합니다. 정밀함 자체가 등가교환 구조예요. 우주의 가장 작은 단위조차 "공짜는 없다"는 원칙 안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현자도, 서양의 철학자도, 물리학의 방정식도 - 표현만 다를 뿐, 결국 같은 세계의 문법을 기술하고 있는 셈입니다.


새는 지렁이를 먹어야 살고, 물고기는 먹이인 줄 알고 낚시를 문다

자연을 보면 이 원리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새는 지렁이를 쪼아 먹습니다. 지렁이의 죽음이 새의 생존으로 전환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이, 필요한 만큼만, 생존이라는 목적에 정직하게 작동합니다.

그런데 낚시 장면을 떠올리면 묘하게 불편해집니다. 지렁이는 낚싯바늘에 산 채로 꿰어지고, 물고기는 먹이인 줄 알고 다가갔다가 입과 아가미에 상처를 입으며 발악할수록 더 깊은 고통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인간은 희열을 느낍니다.

여기서 구조가 달라집니다. 새의 포식은 생존을 위한 등가교환입니다. 그런데 낚시의 쾌락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만족으로 전환하는 구조입니다. 비용을 내가 치르는 게 아니라 타자에게 전가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위반한 존재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연이 만든 가장 복잡한 실험체라고 봅니다. 범고래가 먹잇감을 죽이지 않고 던지며 노는 것처럼, 침팬지가 자위를 하는 것처럼 - 지능이 높아질수록 생존 이상의 '잉여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 잉여가 놀이, 창조, 예술, 철학, 때로는 잔인함으로도 표현됩니다.

결국 인간의 복잡성도 자연스러운 진화의 산물입니다. 자연이 스스로를 벗어나는 방향으로 진화한 결과가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이니까요.


그런데 - 단순한 등가교환이 아니라 '변환'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원리가 등가교환이라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1을 넣으면 1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 성장의 구조는 그보다 훨씬 흥미롭습니다.

러닝을 예로 들어볼게요. 새벽에 일어나 30km를 달리며 쏟아붓는 에너지, 허벅지의 통증, 소모되는 개인 시간 - 이것들이 단순히 칼로리로 되돌아오는 게 아닙니다. 심폐 구조 자체가 재편되고, 역치가 달라지며, 이전엔 불가능했던 페이스가 가능해집니다. 입력과 출력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 이게 바로 변환(transformation)입니다.

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활자를 따라가는 눈의 움직임, 뻐근해지는 목, 뇌가 활성화되며 소모되는 포도당 - 이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사고의 밀도와 언어의 깊이로 돌아옵니다. 1의 고통을 넣었는데 1.5의 역량이 나오는 구조. 이게 성장의 본질이자 묘미입니다.

아이스크림의 순간적인 달콤함이 이후의 설사와 맞바꿔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어떤 교환을 선택하느냐, 그리고 그 교환 안에서 어떤 질의 변환을 끌어내느냐 - 그것이 각자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두 마리 토끼는 불가능한가?

오늘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단, 두 마리 분량의 대가를 기꺼이 치를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둘 다 놓치는 이유는, 두 마리를 동시에 쫓는 행위 자체가 '집중력'이라는 숨겨진 자원을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게 숨겨진 마이너스예요. 대가를 직시하고도 감내하겠다는 선택 - 그게 두 마리 토끼의 전제조건입니다.

가장 나쁜 선택은 대가를 모른 척하는 것입니다. 설사를 알면서도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자체는 괜찮습니다. 설사를 예측하고, 감수하고, 선택한 것이니까요. 문제는 설사가 올 줄 모르고 먹거나, 알면서도 자기기만으로 눈을 감는 것입니다. 그때 고통은 예상을 넘어서게 됩니다.


결국, 세상의 문법은 하나다

오늘 이 모든 대화를 돌아보며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하게 됩니다.

얻으면 잃고, 잃으면 얻는다. 단,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물리학이 말하는 에너지 보존 법칙, 동양 철학의 음양 순환, 불교의 인과, 그리스의 응보 개념 — 전부 같은 문법입니다. 세계는 균형을 향해 수렴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 균형은 즉각적인 등가가 아니라 긴 시간축의 보존 법칙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보존 법칙 안에서 - 잉여 의식을 가진 유일한 존재로서 — 어떤 형태의 교환을 선택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저는 올해 4월 아산이순신마라톤에서 21km 지점에서 DNS를 했습니다. 과도한 훈련량의 대가로 고관절 염증을 얻었죠. 그 고통의 시간 동안 몸을 쓰지 못하는 대신, 이런 사유의 시간들이 쌓였습니다. 그게 가을의 어느 레이스에서, 제 다리 위에 어떤 형태로든 실려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에너지는 소멸하지 않으니까요. 다만 전환될 뿐이니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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